筆者. 타리투
@taritu10
*사망요소 있습니다.
여기는 오늘 비가 내렸어요. 얼마 만에 내리는 비인지 몰라요. 옷깃 스치듯 짧게 지나간 소나기였는데, 하필 전 그때 야외근무를 서고 있어서 가벼운 감기에 걸려버렸지만 말이에요. 거기는 좀 어때요? 그곳도 이곳처럼 비가 내리던가요, 아니면 그때처럼 눈이 오던가요.
아직 겉표지가 빳빳한 노트에 녹슨 만년필을 끄적이며 아츠시는 창문 밖을 힐끔 내다보았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창문을 뚫을 듯 세차게 두드려대던 장관은 어디로 가고, 눈이 부실만큼 쨍한 햇빛이 대낮의 요코하마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활기가 넘치는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만년필을 손가락에 걸고 느릿하게 돌리기 시작했다. 점차 느려지는 속도에 중심을 잃은 만년필은 이윽고 아츠시의 손을 떠나 뭉툭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참을 만년필이 떨어진 그 자리를 응시하더니 이내 만년필을 줍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츠시였다. 끼이익-하는 낡은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밀려나고 손을 뻗어 만년필을 집어든 채 다시 자리에 앉는 아츠시의 표정은 ‘무’ 그 자체였다.
다자이 오사무가 죽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죽음 중 하나였다. 매일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제 존재를 드러내고 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를 지워가는 생명이 있듯이, 무한한 시간 속 무수한 생명들 중 하나가 빛이 완전히 꺼지는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 모를 한 필부의 죽음처럼 길가에 널리고 널린 시시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세상에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고 과거 없는 이가 어디 있냐하지만, 일반 대중들보다 좀 더 각별한 옛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이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남자였다. 굳이 지금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볍게 짚어본다면-.
다자이 오사무.
남성. 24세.
전직 포트 마피아 간부.
현 무장탐정사 사원.
그리고
사망.
문득 머리를 깨는 듯한 아릿한 고통에 아츠시는 눈을 떴다. 귓가에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아직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캄캄한 어둠을 보았을 때, 지금 시간은 아직 해도 뜨지 못한 새벽인 것 같았다. 옆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숨소리에 눈을 돌려 바라보니 이불은 저 발밑에 던져둔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쿄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감기... 걸릴텐데......”
아직 잠이 덜 깬 몸을 애써 일으킨 아츠시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이리저리 구겨진 이불을 펼쳐 쿄카의 작은 몸 위에 덮어주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다시 이불을 걷어차는 쿄카를 보며 한차례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이불을 펼쳐들어 덮어주고는 조심스레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요람의 노래를 카나리아가 불러요.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요람 위에 비파 열매가 흔들려요.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방안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자장가로 잔뜩 웅크려져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며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는 쿄카를 본 아츠시도 따라 어렴풋이 웃었다. 아직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다가 손을 휘적거려 잡은 휴대전화를 열자 선명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 속에 3:30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다시 잘까. 어느새 말똥해진 눈을 깜박거리며 이제 조금씩 보이는 하얀 입김을 천천히 내뿜었다.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이불 밖에 나온 몸은 금세 온기를 잃어갔다. 감기에 걸리기 전에 다시 자야겠다라는 생각에 이불을 들추고 자리에 누우려던 아츠시는 갑자기 환해지는 방안에 숨을 삼켰다.
아츠시는 꼼짝도 못한 채 방 안을 서서히 삼키는 환한 달빛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이 보름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아츠시에 그렇다고 대답하듯 방 구석구석까지 제 빛으로 가득 채우는 달을 보며 심장의 고동소리와 함께 아츠시의 노란색 동공이 열리기 시작했다.
달. 자신의 이능력, ‘월하의 짐승’(月下獣)을 가리키는 자연의 피조물 중 하나.
그리고,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마주쳤던 것.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 했던 존재가 아츠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가를 짚었다.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시큰해지는 눈가와 손에 배어나오기 시작한 물기를 보면 아직 아니었나 보다.
내 생각보다도 당신은 내 마음 깊숙이 박혀있는 기억인가 보다.
“나와 교제해주겠나?”
아츠시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꽃다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혹시 같이 자살해달라는 말의 신종 표현인가요?”
“설마, 물론 동반 자살해줄 미인을 찾고 있는 건 맞다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이지. 오, 안 그래도 마침 저기 동반 자살을 청할 미인이...!!”
“더 할 얘기 없으시다면 전 이만 가겠습니다.”
역시나 쓸데없는 소리였나. 어느새 황홀해진 눈동자를 정면에 고정시킨 채 손에 쥔 꽃다발을 들고 발걸음을 떼려는 다자이였다. 차갑게 식은 얼굴로 다자이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아츠시의 뒤에서 그제야 정신 차린 듯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 잠깐. 기다려보게나 아츠시 군. 아니지, 할 말은 이미 하지 않았나? 나와 교제해 주지 않겠냐고 말이야.”
“그러니까... 누가 보아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걸요.”
“어째서지? 이 멀쩡한 얼굴, 말끔한 옷차림으로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비춰질 수 있는 건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네, 아츠시 군!!”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자이를 보며 아츠시는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 애초에 당신이라는 사람이 꽃을 들고 있다고 해서 그러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처음 꽃다발을 들고 다가온 당신을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차라리
‘꽃향기가 참으로 향기롭군!! 이 향기만을 맡으며 죽는 건 최고의 자살이라 생각한다네!!!’
라며 꽃뭉치를 콧구멍에 집어넣는 당신을 떠올리는 쪽이 더 친숙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입가에 웃음을 그리는 아츠시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한 건지, 찌푸린 얼굴로 아츠시를 가만히 응시하던 다자이가 아츠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츠시는 콧구멍 가득 꽃으로 막혀 끙끙대는 다자이를 떠올리며 살풋 웃다가 눈앞에 다자이의 얼굴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죄, 죄송합... 아니 갑자기 다가오셔서 놀랐어요......”
“아직 이해못했다면 다시 말해볼까? 아츠시 군, 내 연인이 되어주겠나?”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구나. 비장한 얼굴로 자기에게 꽃다발을 내밀고 있는 다자이를 올려다본 아츠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은 걸 난 몇 번이나 보았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다자이의 눈을 피해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하얀 꽃이 방울방울 한가득 담겨 있는 꽃다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카지마 아츠시, 거짓말도 할 줄 아는구나.
물끄러미 아래만을 보고 있는 아츠시의 행동이 거절을 뜻한다 생각했는지 꽃다발을 쥔 다자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잠시 뒤 꽃다발을 들고 있던 손이 옆으로 힘없이 떨어지며 다자이의 낮은 목소리가 아츠시의 귓가에 들려왔다.
“거절... 한다고 해도 강요하지는 않겠네. 굳이 강제로 받아달라고 할 생각까지는......”
“전 동반 자살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전 좋아요.”
입을 떼는 것과 동시에 아츠시는 특유의 예쁜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말과 함께 아츠시가 손을 뻗어 꽃다발을 가져가려하자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아츠시의 손을 기다리지 못한 다자이는 눈앞에 있는 이의 여린 두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그 덕분에 꿋꿋하게 들고 있던 꽃다발은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받아, 받아준 건가?!? 내 마음을 받아준 거야 아츠시 군???”
“깜짝이야...... 네, 맞아요. 아니, 그것보다 저기 꽃다발 떨어졌는데요.”“다시 대답해줘. 아츠시 군, 농담하는 거 아닌가?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어... 어디서 내기라도 해서 거짓말 하는 건 아니지???”
“그런 내기 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다자이 씨......”
살짝 발그레진 볼웃음을 지으며 환하게 웃는 아츠시를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던지,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떼고는 곧바로 아츠시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는 다자이였다. 덕분에 갑자기 품속에 안겨 들어간 아츠시는 몸을 덮치는 다자이의 몸에 순간 휘청거렸다.
“다자, 다자이 씨? 갑자기 왜 그러시는......”
“조금만, 조금만 이대로 있자. 잠깐이면 된다네.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아츠시 군. 조금만 기다려줘.”
무언가를 억누르듯, 한 단어 한 문장 씩 천천히 힘을 주어 말하는 다자이의 말이 바로 귓가를 간질이자 발버둥 치려던 아츠시도 움직임을 멈췄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손이 이내 다자이의 등에 조심스레 얹어졌다.
다자이에게 안겨진 그 상태로 잠시 주춤거렸다가 다자이 허리에 팔을 두르며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코를 스치는 코트의 촉감이 좋았다. 목에 닿는 다자이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허리부터 시작해 등까지 자신을 꽉 안고 있는 다자이의 단단한 팔이, 얼굴에 닿는 다자이 품속의 따뜻한 느낌이. 아아, 당신은 정말.
“...아직, 약속 안 해주셨잖아요.”“이게 다 아츠시 군 때문이라네...... 원래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제가 왜요......”
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를 상상했던 건 너면서.
이미 꽃다발을 든 그를 본 시점에서 기대한 건 너면서.
귓가까지 붉어진 그가 너를 향해 꽃다발을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던 건 너면서.
“아츠시 씨... 울어요?”
“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츠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나오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었... 내가 울었었나. 언제부터 울었지.
“아, 눈에... 눈에 잠깐 먼지가 들어갔네요...... 아하하 괜찮아요. 그보다 저희 지금 뭐하려고 했었죠?”“...사무실 분위기가 한적하다는 의견에 따라 꽃 좀 사러 꽃집에 가는 중이었어요. 오라버니는 잠깐 뭐 좀 사오신다 하셔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요.”
“그, 그럼 빨리 사러 가야죠!! 무슨 꽃을 살까요? 사무실 분위기를 좀 더 띄우려면 예쁜 꽃이 좋겠죠!! 나오미 씨는 좋아하시는 꽃이라도 있으세요? 역시 장미나 튤립? 제가 꽃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눈가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며 아츠시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 나오미를 애써 무시하며 저 멀리서 뛰어오는 타니자키를 보자마자 갈 길을 서두르자며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귀는 듣고 싶었던 모양인지 또렷하게 들려오기만 했다.
아츠시 씨, 역시 요새 이상해요. 자꾸 혼자 우시고 본인은 모르시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 날 이후로.,,,.. 멀쩡했다는 게 더 이상했던 거겠지. 우리가 너무 안일했던 거야. 좀 더 신경을 썼어야하는 건데...,,,
아아, 시끄러워.
귀가 아파왔다. 아니, 귀가 아니라 머리일지도 모르겠다. 머리 한 구석이 콱 막힌 것처럼 제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았고 누가 마취제라도 주입한 듯 서서히 눈앞이 어지러웠다. 누가 심장을 한 손에 쥐어 잡고 짜는 것처럼 갑자기 숨도 쉬기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다리는 내 것이 맞는 건가. 다른 사람의 다리는 아니겠지. 그전에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아츠시 씨?”
용케 제 갈 길은 잃지 않고 비척거리던 아츠시는 뒤를 돌아보았다. 타니자키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나오미가 우두커니 자신을 보는 아츠시에 잠시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꽃집, 다 왔어요.”“아.”
멍청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 다시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자 소박하게 꾸며진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꽃집. 꽃집에 왔어. 그러니까 꽃집에.....
“꽃을 사러 왔었지.”
혼자 중얼거리고는 먼저 꽃집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아츠시였다. 뒤에서 그런 아츠시의 위태로운 뒷모습을 지켜보던 타니자키 남매도 잇따라 꽃집 문 안으로 들어섰다.
기세좋게 꽃집 안으로 들어간 아츠시가 후덕한 인상의 꽃집 주인과 인사를 하자마자 멍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는 걸 보며 어쩔 수 없이 나오미가 다가가 이것저것 가리키며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꽃집 어디를 보아도 각종 꽃들로 가득 차 있었고 눈에 익은 것부터 난생 처음 보는 것까지 다양한 종류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사이 꽃집 주인과 쿵짝이 맞는지 나오미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타니자키도 이런 공간이 어색하면서도 맘에 드는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굳이 어디에 시선을 두지 않고 그저 앞에 있는 꽃을 바라보던 아츠시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점차 가늘어졌다.
분명, 저 꽃은.
“저 꽃, 이름이 뭐에요?”
한참 나오미와 이야기하고 있던 주인이 인사할 때를 빼면 처음으로 입을 연 아츠시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유리전시장에 있던 화분을 닦으며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은방울꽃이에요. 예쁘죠? 제가 아끼는 꽃이라 특별히 관리해주고 있어요.”
“은방울꽃......”
주인이 말해준 이름을 그대로 따라 천천히 발음해보았다. 은방울꽃, 틀림없었다. 다자이가 고백할 때 들고 있다가 결국 바닥에 떨어져 뭉개져버린 그때 그 꽃이었다. 그 뒤로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는데.
“이름이, 은방울꽃이었구나.”
“그러고보니, 그 꽃을 보면 참 재밌는 기억이 떠올라요.”
무슨 재밌는 기억이라도 있는 건지, 주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아츠시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덩달아 포장을 끝낸 화분을 든 나오미와 타니자키도 슬그머니 의자를 끌어와 아츠시 옆에 자리를 만들었다. 주인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웃음이 떠나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몇 달 전이었나? 내가 마침 들어온 아기묘목들 때문에 정신없던 참이었을거에요. 그런데 그 와중에 살면서 본 가장 잘생긴 청년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세상에, 전 무슨 연예인인줄 알았어요. 아무튼 그 잘생긴 얼굴로 웃으면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겠다며 저 꽃을 달라는데 그 순간 후광이 비치는 줄 알았...... 아유, 요 방정맞은 입 좀 봐. 그래서 제가 보통 고백할 때는 장미를 쓰니까 가장 품질 좋은 장미를 내준다 해도 끝까지 말을 안 듣는 거에요. 하도 그렇게 은방울꽃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어보니까 글쎄, 저 꽃이 그 사람의 탄생화라는 거 있죠. 나 참, 아무리 탄생화라도 그렇지. 가끔 그렇게 엉뚱한 남자들을 보면 귀엽기도 하고, 저래서 젊은 연애가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분명 달달한 내용이건만 왠지 모르게 주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 한 구석이 차갑게 얼어가는 듯 했다. 나오미가 로맨틱한 남자라며 타니자키를 들볶는 현장 옆에서 아츠시는 한참을 다물고 입던 입을 겨우 움직여 말했다.
“......좋은 분이셨네요.”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그래도 보통은 중간에 제가 하도 꼬셔서 장미를 사 가는데 정말 그만큼 생떼를 부리는 청년은 처음이어서 제가 좀 더 깊숙하게 물어봤잖아요. 한참을 말할 수 없다면서 공짜로 해주겠다니까 결국 하는 말이......
그 사람, 많이 아픈 사람이에요. 많이 아파서, 아직 본인이 살아있다는 걸 축복이라 여기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한테 본인만을 위한 날에 의미를 갖는 본인만의 꽃을 주면서 고백하고 싶어요. 당신은 살아있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당신이 살아있어서 난 행복하다고.
-라면서 이렇게 고백하려고 하는데 역시 이상하려나요? 하고 웃는데 맙소사. 당장이라도 남편 버리고 쫓아가고 싶더라구요. 그 상대는 얼마나 행복할지, 분명 전생에 우주는 구했을 거에요. 그 고백한다는 사람이랑 잘됐으면 좋았을텐데. 왜 나한테는 그런 남자가 없고 지금의 남편이 온 건지 세상은 정말 불공평해요.”
눈앞에 그 남자가 있기라도 한 건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는 주인을 보며 아츠시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서는 이미 한 편의 로맨스 영화를 본 표정을 하고 있는 나오미와 그런 나오미가 옷을 들추려하자 어쩔 줄 몰라하는 타니자키가 있었다.
그래, 한 편의 영화같은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의 이유를 줄 수 있는 의미를 갖는, 그 사람의 탄생화로 고백하려는 잘생긴 청년......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를 것이다. 눈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주인조차 그 결과를 모르니까. 그리고 그 상대가 누구인지도 자신은 모를 것이다. 모를 것이 분명한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일텐데 자꾸 아츠시의 귀에 들려오는 꿈 속 잔상 같은 목소리.
‘이게 다 아츠시 군 때문이라네...... 원래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설마.
“혹시, 그 은방울꽃이 탄생화인 사람들의 생일이 언제인지 아시나요?”
뜬끔 없이 터져 나오는 질문에 이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을 한 주인이 볼을 긁적였다.
“제가 꽃을 좋아해도 그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서요. 대신 저기 그런 잡다한 것들을 정리해놓은 책이 있을 텐데, 잠깐만요.”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주인이 서랍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이다. 세상에는 저런 이야기도 있지하며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리가 떨리고 난 진정하지 못하는 거지.
이제 아츠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지 나오미가 조심스럽게 아츠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나오미가 눈앞에서 뭘 하든 이제 주인이 찾고 있는 물건에만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아츠시였다.
“은방울꽃이.... 어디 있더라...?”
제발, 제발. 그냥 약간의 궁금증일 뿐이야. 그냥 조금 마음에 걸려서, 확인만 해보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렇지?
“아, 찾았어요.”
그러니까 그날만큼은, 제발 그날만큼은.
“5월 5일이에요. 다음 주에 돌아오는 날이네요.”
“하.”
굳게 다물고 있던 입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허망한 웃음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볼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그저 눈앞에 놓여진 은방울꽃을 바라보며 울기만 하는 아츠시가 있었다. 그런 아츠시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달래려 애쓰는 세 사람이었지만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두 손 가득 은방울꽃이 담긴 화분을 감싸안고는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리는 아츠시였다.
다자이 씨, 당신은 끝까지.
그 꽃을 제게 준 건 사랑의 표현만이 아니었던 건가요. 제가 계속 살아가주었으면 하는 의미도 함께 전해주었던 건가요.
내 생일, 내가 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 그 날을 기념하는 탄생화, 은방울꽃을 나에게 준 건.
이것도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차라리 모르셨길 바랄게요. 이것마저 알고 계셨다면 너무 비겁하니까요. 다자이 씨. 혹시 알고 계셨어요? 은방울꽃의 꽃말은-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