筆者. 음새
@seamless_joint
'ㄲ' 떨어진다.
'ㅗ' 떨어진다.
'ㅊ' 떨어진다.
꽃은 꽃이라는 저주의 이름을 버릴 때,
비로소 꽃에서 해방된다.
-김봉식, 낙화
임무시간 외에 만나는 일이 적어서 다행이라고, 나카하라 츄야는 생각했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쑥불쑥 구토감이 치밀어 참기 어려워 곤란하던 참에 점점 마주치는 일이 줄어들었고, 종국에는 그가 조직을 떠났다. 다자이 오사무. 나카하라가 꽃을 토하는 이유였다.
나카하라 츄야. 포트마피아의 간부라는 명칭과 걸맞지 않게 그는 병을 앓고 있었다.
하나하키 증후군
마피아라는 사람이 우습게도 사랑 따위에 놀아나고 있었다. 벌써 몇 년째인지 기억조차 못 할 정도로 오래 앓았고 아팠다. 다자이가 포트 마피아에 몸을 담고 있을 때부터 그가 나간 이후에도 나카하라는 계속해서 그의 꽃을 토했다. 익숙한 듯 모자로 입을 가린 채 약하게 콜록대는 나카하라의 입에서 붉은 장미꽃이 피어올랐다.
이럴 때 쓰려던 모자가 아니었는데. 쓴웃음을 지으며 모자 속 장미들을 탈탈 털어 버렸다. 이 장미들처럼 내 마음도 쉽게 버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시작부터 좋지 않았던 관계였다. 어긋난 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고 그렇게 되길 바라왔다.
그렇게 바라왔건만-
“대체,”
일시적 휴전이라는 말을 듣고 몸에 힘이 빠졌다. 어떠한 루트를 통해서라도 이곳으로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큐의 탈환에 무장탐정사가 발 벗고 나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협력해야 할 상대가 누구라고 전해 듣지 못해 장소에 도착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약속된 장소에 있는 사람은 탐정사 직원 중에 가장 익숙한 모습이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저 쓰레기를 처리한 다음엔 네놈 차례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의욕이 없었던 거라고“
나카하라는 엄포를 날리며 툴툴거리는 다자이의 앞에 설 때까지 계속 머릿속으로 꽃을 토하지 않으려는 방법을 생각해내기 위해 애썼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 뭐였더라. 어떻게 하는 거였지.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면서 적을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적의 숫자가 상당히 많기도 했고 까다로운 상대 덕분에 오탁을 쓸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장미는 가시도 느껴지지 않았고 쓰러지기 직전 다자이를 마주 보면서도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 날 이후로 나카하라의 목에서는 가시가 돋아나지도 기침을 하면서 꽃을 토하지도 않았다.
시원하면서도 섭섭했다. 마른기침이 나올 때마다 버릇처럼 모자를 벗어 가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꽃은 떨어지지 않았다. 목에서 느껴지던 뾰족뾰족한 가시의 맛도 사라져버렸다. 홀로 마음 정리가 끝난 것일까. 이렇게 쉽게 끝날 병이었다면 진즉 나았어야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모자를 고쳐 쓰며 허탈하게 웃었다.
분명 보고 싶은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 모두 그대로인데 꽃의 향이 느껴지지 않으니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꽃을 토해 낼 때가 나을 정도로 나카하라의 마음이 공허해져 갔다.
이전부터 굳이 찾아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앙숙에 더 가까웠던 사이였다. 따지자면 나카하라의 일방적인 마음이었으니 꽃이 더는 피지 않는다 해서 다자이를 원망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카하라는 마음 한구석으로 다자이를 원망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표현하지도 않았던 마음인데 이대로 영원히 살아간다 해도 나카하라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서운했다. 그 서운함을 알 리 없는 다자이에게 몰래 원망을 돌리곤 했다.
나카하라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변한 것인지 혼란스러워 며칠을 넋을 놓고 지냈다. 분명 다자이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렸고 코끝이 시려 왔음에도 꽃은 토해내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분명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꽃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카하라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크게는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린 것 같이 느껴졌다.
무장 탐정사와 포트 마피아 공통의 적인 길드가 물러났다. 물론 그렇다 해서 나카하라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사가 하나 빠져버린 나카하라에게 그보다 큰일이 생기면 바로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다자이 없이 오탁을 사용해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 느낄 정도로 마음이 심란했다. 나카하라의 방황은 포트 마피아 사이에 꽤 유명한 화젯거리였다. 불러도 듣지 못하는 것부터 크게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는 실수를 하기도 해서 모두에게 큰일이었다. 얼만큼의 파급력을 가졌냐하면 나카하라의 일에서 손을 떼었다고 이야기하던 오자키가 나설 정도였다.
막 본부로 출근했던 나카하라의 뒷목을 잡아끌고 취조실 비슷한 곳으로 들어가 장시간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오자키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방에서 나왔고 나카하라는 여전히 조금 나사가 하나 빠진 표정으로 나왔다. 후에 나카하라의 부하 한 명이 오자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문을 얻으러 갔다가 그런 근성이 썩어빠진 녀석은 가르친 적 없으니 당장 돌아가라는 화풀이만 들었다고 몸서리를 쳐서 선뜻 누가 나서서 나카하라에게 사정을 물어보지 못했다. 겉으로만 평화로운 날들 사이에 나카하라는 점점 야위어갔다.
방심. 한동안은 습격당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너무 편하게 지냈다. 길드에서 새로운 이 능력자를 고용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바로 간부를 노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새로운 이 능력자를 제외한 적은 모두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나카하라의 부상이 심각했다. 길드의 이 능력자는 쓰러진 나카하라의 숨통을 끊으려 했지만, 뒤에서 다가온 손길에 저지당했다. 이 능력자를 향해 뻗어오는 손. 나카하라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고 눈을 뜨니 처음 보는 곳이었다. 오래된 다다미향이 은은하게 나는 방. 나카하라가 누워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자이가 책을 읽고 있었다.
“다자이?”
“여어 츄-야. 드디어 눈을 떴네. 정말 마피아의 간부라는 사람이 이렇게 약하면 포트 마피아의 체면이 어떻겠는가.”
“나 혼자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어!”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다네. 자넬 요시노에게 보여 줄 순 없어서 내 손으로 치료했어.”
“그냥 죽게 놔두지 그랬냐. 여전히 재수 없고 오지랖만 넓어선.”
“하하 내가 오지랖이 넓다고? 츄-야.”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시선이 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에 있어 반가운 얼굴이면서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몰래 쌓아온 원망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마음은 아마 사라지기보다 더 몸집을 불려 나갈 것이지만. 그 원망스러운 마음을 근거로 다자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억지라는 것을 나카하라 자신도 잘 알고 있으므로 괜한 소리를 하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음은 분명.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라는 생각이 든 순간 다시 풀썩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어라? 하는 의문과 함께 순식간에 다시 이불에 말려 정자세로 눕혀졌다.
“츄-야. 아직 다 낫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는데 자네 머리는 장식인가? 정말 한심하군.”
“웃기지 마 내가 고작 이따위 부상으로-”
“물론-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겠지만”
이불에서 간신히 빼낸 손이 다자이에게 잡혀 머리 위로 올려졌다. 억지로 돌려진 탓에 뼈가 아릿해 눈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날카롭게 변한 공기에 손을 결박한 다자이를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친 다자이는 잠깐 알 수 없는 눈빛을 했지만, 곧 그 특유의 웃음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변했다.
“한 번만 더 일어나겠다고 하면 내가 더 큰 부상으로 만들어주겠네”
물론 입에서 나온 말은 눈빛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지만.
나카하라는 덕분에 일주일을 다자이가 있는 방에서 보냈다. 정신이 든 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옷이라고 입고 있는 건 다자이의 셔츠에 바지. 이대로 집에서 나와 누군가의 눈에 띄면 평생을 놀림 받을 것 같이 줄줄 흘러내렸고 더욱이 나카하라가 문 쪽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마다 다자이가 빙글 웃으면서 ‘츄-야, 어디 가는가?’ 라고 물어봐서 나갈 수 없었다. 다자이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열면 곧바로 손목을 잡혀 이번엔 이불이 아닌 방을 굴러다니는 노끈으로 묶일 것 같아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독히도 길었다. 초침을 이리저리 돌려도 시간은 늘 일정하게 가고 있었지만 나카하라는 벽에 걸린 시계를 노려보며 다자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다자이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말하면서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나카하라의 행동 하나하나를 말없이 지켜보는가 하면 별 의미 없는 행동에 딴죽을 걸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동안 다듬을 생각을 못 해 엉망진창으로 길어버린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걸 보더니 “츄-야 원래도 잘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정말 엉망이니 더 못 나보이는군” 하곤 읽던 책으로 나카하라의 머리를 덮어버렸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그런 식으로 면박을 주면서 식사시간에는 꼬박꼬박 나카하라의 끼니를 챙긴다는 거였다. 첫날과 그다음 날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이대로 홀로 나갔다 다시 습격당하면 정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 사흘째 아침 잠결에 따뜻한 손길을 느낀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 다자이는 없었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편의점을 다녀온 것인지 손에 봉투를 낀 채 집으로 돌아왔다. 나흘째. 나카하라는 첫날보다 더 무리 없이 방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길게 이어질 변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다자이의 변덕을 받아들이기로 한 게 사흘째 밤이었고 더 이상 문을 향해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그런 나카하라를 눈치챘는지 다자이는 현관보다 나카하라에게 가까이 앉아 책을 읽었다. 더 느리게 달리지 않고 그렇다고 더 빠르게 달리지 않는 시계 초침 소리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시곗바늘이 멈추면 좋겠다는 한심한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흘러 일주일 째 아침. 나카하라는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고 그날도 역시 눈을 뜨기 전에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주는 손길이 싫지 않았다. 꿈이어도 좋았다. 이 집을 나서는 순간 잊을 백일몽이라도…. 답지 않은 생각을 한다며 나카하라는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봤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방안의 풍경 사이 잘 쓰이지 않던 방문 너머로 다자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아직은 안된다네. 집에 손님이 좀 있어.”
“……….”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냐고? 글쎄.”
“…….”
“다친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다네. 예민해서 다른 사람은 들이면 안 된다고-”
“……….”
“아하하, 귀찮다면 귀찮지.”
통화하는 건지 다자이의 목소리가 들린 후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다시 기분 좋은 듯 웃고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다, 마지막 말에 나카하라는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지난 며칠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자이의 변덕에 자신도 장단을 맞춘 것뿐이었다. 그가 언제든 마음을 바꿔 포트 마피아의 간부인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자신을 노리는 길드의 이 능력자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올지도 몰라서 나가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흐리게 보여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돌아가 한 달을 칩거하다시피 살았다. 그 일주일의 달콤함을 다시 갈구할까 봐. 무장 탐정사와 포트 마피아를 동시에 습격한 길드의 이 능력자들 탓에 다신 없었을 무장 탐정사와 포트 마피아의 동맹이 한 번 더 이루어졌다. 전에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막상 만나지 않으려니 이상하게 전보다 더 많이 마주쳤다. 나카하라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자이와의 재결합은 아직 권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카하라가 가는 곳마다 다자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다자이의 향이 느껴졌다. 의도적으로 피하면 피할수록 다자이의 목소리와 향이 더욱 가까워졌고 나카하라는 울고 싶어졌다. 여전히 꽃은 피어나지 않았지만, 전보다 심장이 더 아팠고 꿈같던 일주일의 기억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 자신을 짓눌러 죽여 버릴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과 반대로 걸어가려 몸을 틀었을 때 시선 끝에 다자이가 걸리자마자 꽃들이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울컥 피어나는 꽃들은 나카하라가 무얼 어떻게 하기도 전에 와르르 쏟아졌다.
피어나는 꽃의 종류는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장미. 지독한 향과 통증을 가진. 나카하라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 꽃. 적당히 하란 말이야! 차마 입으로 외칠 수 없어 속으로만 소리쳤다. 제 몸인데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분하고 하필이면 ‘그’ 다자이 앞에서 이렇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는 것이 화났다. 여태까지 보고 싶어 할 땐 단 한 송이도 피워내지 않더니 이렇게 도움이 안 되는 병이다. 모자로 담아낼 수 있는 꽃에 양은 한계가 있어서 한 송이, 한 송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발로 뭉개고 차며 애써 뒤로 돌아 걸었다. 아니 걷고 싶었다. 어느새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라 어느 쪽이 앞이고 뒤인지 구분할 수도 없어졌다.
“츄야- 자네에게 줄 선물이 있다네.”
쏟아진 꽃을 정신없이 밟는 사이 다자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카하라의 뒤에 다가섰다. 눈물이 계속해서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지만, 다자이의 말을 무시하고 도망가기엔 지는 기분이 들어 괜히 눈에 힘을 준 채 돌아섰다.
“뭔데 망할 다자이.”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다자이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눈물에 번져 보이자 열이 받으면서도 다시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정말 한계가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피와 함께 꽃을 토하느니 차라리 마음을 접는 게 빠르지 않을까. 이전에 잠시 꽃이 멎었을 땐 꽃을 토하는 게 그립다고 생각했었던 과거의 자신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말없이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그를 바라보던 나카하라의 눈에서 힘이 풀릴 때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넬 혼자선 둘 수 없고, 나도 혼자 있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네.”
“지금……,”
“나와 함께 해주게, 츄-야.”
다자이가 내민 손안엔 장미보다 붉은 동백이 피어있었다.
나카하라 츄야의.
나카하라 츄야 4월 29일생 탄생화 동백
다자이 오사무 6월 19일생 탄생화 장미